웃음, 그 불온하고 위대한 해방의 서사 그리고 30년의 재독(再讀)


장미는 시들고, 기호(記號)만 남았다.
‘고전(Classic)은 언제나 독자의 시간이 무르익기를 침묵 속에서 기다린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이 거대한 지적 미로를 통과하는 데 꼬박 30년이 걸렸다. 10대에는 벽돌 같은 물성(物性)에 압도되었고, 막 30에 접어든 무렵에는 그 안에 담긴 정치적 함의에 전율했다. 그리고, 2026년, 오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가 설계한 기호의 숲을 조망한다. 이것은 책에 대한 리뷰이자, 동시에 나의 정신적 성장기다.
1994년, 침묵하는 텍스트
《장미의 이름》을 처음 만난 건 1994년, 혹은 1995년으로 기억한다. 입시 전쟁이 한창이던 고교시절, 참고서와 문제집 틈바구니에서 나는 무슨 오기였는지 이 벽돌 같은 책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독서라기보다 차라리 치기어린 허영에 가까웠다. ‘이 시대 가장 획기적인 데뷔소설’이라는 문구도 선택에 한 몫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결과는 참패였다. 압도적인 두께는 차치하고 페이지의 절반을 뒤덮는 주석과 난생처음 보는 라틴어 인용구의 향연은 어질했다. 중세 수도원의 일과와 전례에 관한 빽빽한 묘사 또한 더 이상 읽히기를 거부하는 텍스트의 일부였다. 그렇게 《장미의 이름》은 방 한구석에서 하염없이 방치되었다. 책의 두께만큼 무거운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고, 그위로 두터운 먼지가 쌓여갔다.
2009년, 불타오르는 웃음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2009년, 우연히 발견한 동명의 영화에 얄팍한 술수가 발동한다. 나는 이 우회로를 통해 해묵은 난제를 해결하기로 하낟. 매서운 눈보라에 고립된 수도원을 배경으로 영화는 시작되었다. 그곳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숀 코너리가 연기한 윌리엄 수도사의 추리는 호기심을 자극했고 고도의 집중을 불렀다. 소설을 충실히 재현했다는 미장센은 미로같은 중세 도서관의 시각적 체험을 가능하게 했으며 무엇보다 전체 줄거리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던 것은 큰 수확이었다.

새로운 길잡이,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를 만난 것도 그무렵이다. 도서 전체에서《장미의 이름》에 할애된 적지 않은 페이지를 읽으며 나는 미학서가 추리소설을 왜 그토록 진지하게 다루는지가 궁금해졌다. 당시 막 30대에 접어든 나는 다시 책을 펼쳤다. 비로소 에코가 설계한 미궁 속으로 발을 들이자 막막하기만 했던 중압감은 어느새 흥미진진한 호기심으로 변모해 있었다.
소설은 중세 이탈리아의 고립된 수도원을 배경으로 한다. 표면적으로는 연쇄 살인 사건을 추적하는 윌리엄 수도사의 추리극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기호학적 상징과 신학적 논쟁이 촘촘히 얽혀 있다. 에코는 황제와 교황의 대립, 청빈과 권력의 모순, 그리고 금욕이라는 이름 아래 억눌린 욕망들이 수도원이라는 폐쇄된 공간 안에서 곪아가는 과정을 서늘하게 그려낸다.
당시 나의 시선은 서사의 ‘내용’에 집중되어 있었다. 누가 범인인가. 왜 수도사들은 연쇄적으로 죽어갔는가. 호르헤는 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 ‘희극’편을 그토록 두려워했는가. 암흑의 중세, 이탈리아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의문의 살인 사건. 기호학을 기반으로 한 추리 형식은 지적 유희 그 자체였다. 단 한줄의 막힘이 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하지만 과정에서 재미는 물론, 에코의 방대한 지식에 감탄과 경의를 표하며 그렇게 《장미의 이름》을 완독할 수 있었다.
권위는 왜 웃음을 두려워하는가
이 거대한 서사는 사라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 ‘희극’에 대한 지적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제1권 ‘비극’편에 잠깐 언급되었지만 실체를 찾을 수 없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 그 사라짐에 대한 에코의 탁월한 상상력이 방대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냉철한 판단에 근거하여 펼쳐진다. 암흑의 중세 유럽에서 그것은 우연한 유실이 아니라, 치밀한 ‘은폐’였다.

소설 속 맹인 수도사 호르헤는 이 책을 지키기 위해, 아니 세상으로부터 격리하기 위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 거룩하고 엄격해야 할 수도원에서 ‘웃음’은 악마의 존재였다. 웃음은 권위를 비판하고 경건함을 조롱하며 절대성을 파괴한다. 더구나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라는 점은 더욱 위협적이었다.
“웃음은 공포를 없애준다. 공포가 없으면 신앙도 있을 수 없다.
악마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면, 신을 필요로 하는 마음도 사라진다.”
호르헤의 논리는 섬뜩하리만치 정확하다. 중세의 질서, 즉 봉건적 계급과 교회의 절대 권위는 민중의 ‘두려움’을 먹고 자란다. 엄숙함과 경건함은 지배를 위한 가장 효율적인 도구다. 그런데 웃음은 이 모든 엄숙함을 단숨에 무력화한다. 권위자를 조롱하고, 절대적 진리를 비틀며, 공포를 유희로 바꾸는 순간, 지배 시스템은 균열을 일으킨다. 호르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체제를 전복시킬 수 있는 불온한 폭탄이었다.

호르헤는 영원히 세속의 접근을 차단하고자 했다. 그러나 인간의 지적 호기심은 개인의 죽음으로도 막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책에 독을 묻히고, 끝내 도서관을 불태움으로써 웃음을 영원히 봉인하려 한다. 책장을 하나씩 뜯어 불에 태워버리는 그 광기 어린 집착을 보며 나는 전율했다. 그것은 단순한 악인의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가 무너질 것을 직감한 권력자의 처절한 방어기제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은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타오르는 책, 그리고 남겨진 질문
진중권은 《미학 오디세이》에서 《장미의 이름》 속 웃음에 대한 배척을 봉건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장치로 해석했다. 이 지점에서 그의 통찰은 절반의 진실을 담고 있다. 웃음이 견고한 체제를 균열 내는 불온한 무기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간과한 나머지 절반은 웃음의 지향점이다. 호르헤 수도사가 두려워했던 것이 진리의 파괴였다면, 우리가 목격한 것은 인간의 해방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호르헤의 공포는 이미 현실이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엄숙한 권위 앞에 주눅 들지 않는다. 공항 입국장을 나서며 수행원에게 캐리어를 밀어 던지던 정치인의 무심한 권위주의는, 대중의 카메라에 포착되는 순간 ‘노룩 패스’라는 조롱 섞인 밈(Meme)으로 변질된다. 누군가는 이를 단순한 가십으로 소비하고 휘발시키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 웃음이 없었다면 그 권위주의적 논조는 공론장의 문턱조차 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웃음은 비난의 대상을 광장 한복판으로 끌어내어 비로소 사유와 논쟁의 영역으로 밀어 넣는 ‘소환 장치’다.
그리고 호르헤는 틀렸다. 웃음은 예술을 죽일 의도도, 그럴 능력도 없다. 그것은 예술을 표현하는 수많은 방법론 중 하나일 뿐이다. 오히려 ‘밈’이라는 형식은 가볍고 빠른 성질 속에 메시지를 극도로 농축해야 하는 현대적 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밈은 사유의 스위치를 당기는 영감이 되기도 하고, 그 자체로 예술적 완성도를 갖춘 풍자가 되기도 한다. 웃음은 예술을 죽인 것이 아니라, 비로소 인간을 엄숙함의 감옥에서 해방시켰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깨닫는다. 독서란 텍스트를 읽는 행위를 넘어, 그 서슬 퍼런 문장에 비친 나의 성장을 체감하는 과정임을. 입시 전쟁 속에서 지적 겉멋에 취해 책을 펼쳤던 소년은, 이제야 비웃음 당할 권위와 조롱받을 엄숙함의 무게를 아는 어른이 되었다. 웃음이야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우아한 저항임을,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을 통해 비로소 상기한다.
흩어진 기호의 미학(The Semiotics)
2009년, 당시 나는 호르헤의 광기 어린 방화(放火)를 보며,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 있는 엄숙주의의 망령을 보았다. 그것은 ‘범인은 누구인가’를 쫓는 스릴러이자 ‘권력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를 묻는 사회과학적 탐독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17년이 흐른 2026년, 세월의 무게가 내려앉은 지금 다시 펼친 《장미의 이름》은 더 이상 범인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에코는 윌리엄 수도사가 눈 위의 발자국을 보며 실체를 유추해 내는 과정을 통해 ‘세상은 수많은 기호로 이루어진 숲이며, 우리는 그 기호들을 해독하며 진실에 다가가려 애쓰는 존재’라 말하고 있다. 범인을 잡는 결과보다, 단서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의미를 만들어내는 그 지적인 미로 찾기 과정 자체에 소설의 진짜 아름다움이 존재했다.
삶은 해답이 적힌 페이지가 뜯겨 나간 추리 소설이다. 어쩌면 나는 이 거대한 사건의 진상을 영영 밝혀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결말에서 나는 다만 문장들을 더듬어 읽는다. 오늘 마신 커피 한 잔, 스쳐 간 바람 한 줄기라는 소소한 단서들이 모여 ‘나’라는 미궁을 이룬다. 기호로 가득 한 이 미로에서 나는 기꺼이 길을 잃기로 한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들뿐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책의 마지막 문장이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2009년의 내가 서사의 결말을 향해 달렸다면, 오늘의 나는 비로소 그 심연을 응시한다. 실체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는 허무함. 그러나 에코는 그 허무조차 아름답게 조각했다. 사라지는 것들의 뒷모습을 기억하려는 인간의 애틋한 몸부림. 이름을 붙이고, 기록하고, 전승하려는 집요한 노력. 그것이 바로 문학이며, 기호의 본질이다.
마침표 너머 사라진 이름들
오늘날 나는 문장과 문장 사이에 놓인 구조적 아름다움을 음미한다. 치밀하게 축조된 도서관의 묘사, 중세 신학 논쟁의 디테일은 지루한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벽하게 설계된 고딕 성당의 기둥이었다. 1994년, 글자를 읽던 청소년의 막막함은 호기심이 되었고, 2009년, 청년은 줄거리를 읽었다. 그리고 2026년, 구조를 읽는 중년의 시선은 관조(觀照)에 닿았다. 세월은 동일한 텍스트를 완전히 다른 책으로 만들었다. 텍스트(Text)를 읽던 눈이 컨텍스트(Context)를 읽는 눈으로, 다시 구조(Structure)를 꿰뚫는 눈으로 성장한 것이다.

고전은 독자의 시간을 기다려준다. 30년의 시차를 두고 읽어낸 《장미의 이름》은 단순한 추리 소설이 아니었다. 인간이 지식을 다루는 방식, 믿음을 지키려는 광기, 그리고 사라지는 것들을 기억하려는 슬픈 열망에 관한 거대한 기록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은 사라졌다. 어쩌면 호르헤 같은 인물에 의해, 어쩌면 전혀 다른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저 존재했다는 기록만 남은 그 이름을 붙잡고, 사라진 것들에 대한 상상력으로 완성된 소설은 그 자체로 《장미의 이름》이다.
나의 30년 독서 또한 하나의 이름이 될 수 있을까? 소년의 막막함, 청년의 재발견, 중년의 통찰. 이 모든 것이 켜켜이 쌓여 《장미의 이름》이라는 고전 위에 나만의 서명을 덧붙인다. 책장을 덮는다. 장미는 시들었지만, 그 이름의 향기는 30년 전보다 더욱 짙게 내 안의 서재를 채운다. 다음 10년 후, 나는 이 미궁 속에서 또 어떤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될까.
※ 이 글은 2009년, 작성된 독서 감상을 2026년의 시선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Invitation]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당신만의 서사가 시작됩니다.
텍스트 안의 세계를 넘어, 삶이라는 리얼리티(Context)를 응시합니다.
작가가 설계한 문장의 숲을 지나, 이제 당신의 일상을 재해석할 새로운 시선을 제안합니다.
- For Seekers: 활자 너머의 본질을 파고들며, [삶의 정답]이 아닌 자신만의 질문을 찾고 싶은 분.
- For Creators: 익숙한 문장을 낯설게 읽으며, 새로운 [영감의 문장]을 채집하고 싶은 창작자.
- For Dreamers 책 속의 세계를 꿈꾸지만, 동시에 현실의 [구조와 방향]을 고민하는 모든 주인공.
당신이라는 이야기의 주도권은 오직 당신에게 있습니다.
이 리뷰가 당신의 다음 챕터(Chapter)를 여는 작은 열쇠가 되기를 바랍니다.
취향의 서재는 언제나 당신의 사유를 기다립니다.
Life Architect, EOM YONG SUN
삶의 밀도를 짓고, 시간의 결을 수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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