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백제 미학의 현대적 번역에 관하여

Director’s Note: 가산(加算)의 시대, 침묵의 건축
“도시의 소음과 시각적 과잉에 지친 현대인에게 ‘집’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 2025년의 시점에서 지난 프로젝트 묵화담(墨畵淡)을 다시 펼쳐보는 이유는 이 근원적인 질문과 마주하기 위해서다.
회색 빌딩 숲이 만드는 거대한 장벽과 화려한 네온사인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종종 길을 잃는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더하고 채워야만 비로소 가치가 증명되는 ‘가산(加算)의 시대’. 묵화담은 ‘덜어냄의 미학’으로 정반대의 지점을 가리킨다. 그것은 속력이 아닌 방향에 대한 이야기이며, 채움이 아닌 비움에 대한 건축적 해답이었다.
각양각색의 전원주택이 저마다의 목소리를 높이는 동현마을의 풍경 속에서, 유독 시선을 붙잡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고요한 집이다. 산세를 거스르지 않고 낮게 엎드린 순백의 매스(Mass). 화려한 기교 대신 가장 담백한 선(Line) 하나를 긋는 마음으로 지은 집. 묵화담은 그렇게 세상의 소음을 소거하며 서 있다.
이 글은 단순한 프로젝트 소개가 아니다. 물리적 공간에 철학을 입히는 과정의 기록이며, 천 년의 미학을 2025년의 언어로 번역하는 시도의 기록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산의 시대에 침묵을 설계한다는 것이 무엇 인지에 대한 증명이다.

침묵의 문법: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오래 두고 보아도 질리지 않는 집의 생김은 최소한의 장식으로 모던한 개성을 지닌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는 백제 건축사상의 정수를 담은 말로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을 지닌다. “무엇을 더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덜어낼 것인가”를 묻는 건축적 태도, 묵화담은 이 역설적 균형 위에 세워졌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다’는 것은 절제의 품격이다. 오늘날의 하이엔드(High-end)는 종종 ‘더하는 것’으로 오해받는다. 더 비싼 마감재, 더 복잡한 장식, 더 거대한 규모를 좇는다. 하지만 묵화담은 철저하게 ‘덜어냄’의 미학을 실천하였다. 군더더기 없는 순백의 매스는 그 자체로 완결된 조각이며, 질감이 살아있는 미색의 석제 타일 담벼락은 한국 전통의 패턴을 모던하게 재해석 하였다. 재료 본연의 물성과 비례감만으로 완성한, 장식이나 기교를 최소화하여 꼭 필요한 요소만을 남긴 미니멀리즘은 역설적으로 공간에 기품을 부여했다. 오래 두고 보아도 질리지 않는 단아한 품격이다. 2025년의 시선에서 이 집이 여전히 모던한 생명력을 갖는 이유는, 유행을 쫓지 않고 본질을 지켰기 때문이다.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것은 자연을 빌린 풍요로움이다. 진정한 럭셔리는 종종 ‘소유하는 것’으로 오해 받는다. 값비싼 샹들리에, 희귀한 대리석, 압도적인 오브제를 쫓는다. 하지만 묵화담은 온전하게 ‘향유함’의 미학을 실천하였다. 거실 너머 펼쳐지는 불곡산의 능선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명화이며, 안방의 윈도우 시트와 욕실의 천창은 전통 건축의 차경(借景)을 현대적으로 재해석 하였다. 아침의 이슬과 저녁의 노을, 쏟아지는 빛 만으로 완성한, 인위적인 치장을 배제하고 자연을 공간의 주인공으로 삼은 디자인은 역설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갤러리를 만들었다. 매일 보아도 늘 새로운 생동하는 풍경이다. 2025년의 시선에서 이 집이 더욱 지속 가능한 아름다움을 품는 이유는, 소비되는 물질이 아니라 순환하는 영원함을 담았기 때문이다.


묵(墨)·화(畵)·담(淡): 먹의 농담처럼 번지는 집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공간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첫 번째 행위다. 우리는 이 공간에 ‘묵화담(墨畵淡)’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세 채의 집에 각각 한 글자씩을 부여했다. 깊이 있는 사색과 내면의 밀도를 나타내는 묵(墨), 자연을 프레임에 담아내는 그림 같은 풍경인 화(畵). 그리고 심을 비워낸 맑고 편안한 마음을 뜻하는 담(淡). 먹의 진함, 그림의 형상, 농담의 옅음. 세 집은 독립적이되 서로 조응하며, 하나의 묵직한 작품을 완성했다.
문인의 정신과 기상을 그린 묵화(墨畵)는 ‘여백의 미’와 ‘중첩의 미학’이 공존한다. 붓끝에서 번져나가는 먹이 화선지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다양한 층위를 생산하듯, 건축은 자연을 위압하지 않고 부드럽게 대지에 스며든다. 빛을 주도하는 내향적 공간의 단아한 품격은 농익은 깊이감을 주되 결코 무겁지 않으며, 지조와 절개를 품은 선비의 정신을 닮아 있다. 물과 흙, 바람이 조화로운 자연의 품 안에서, 묵화담은 단순한 물리적 주거 공간을 넘어선다. 이곳은 사는 이의 삶이 먹의 농담처럼 은은하게 번지고 기록되는, 가장 고요한 배경이 되기를 자처하는 곳이다.
대지(垈地): 땅이 건네는 낮은 소리
대지는 많은 말을 했다. 빛의 기운과 바람의 길, 흙의 질감과 잎새의 품격까지. 우리는 그 낮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이 땅은 무엇을 원하는가?” 일조량 테스트와 동선 파악 등 철저한 대지 분석을 통해 도출된 매스의 배치와 섬세한 창호 계획은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다.
레벨의 차이가 확연한 대지 위, 묵(墨)-화(畵)-담(淡) 세 채의 매스(Mass)가 산의 흐름을 따라 ‘L’자 형태로 배치되어 충분한 빛과 다채로운 풍경을 집 안으로 불러들였다. 이를 감싸는 일체형의 담장은 시선의 흐름을 수평으로 안내하며 숲과 이질감 없이 어우러진다. 기품 있는 볼륨과 주변 환경을 누르지 않는 ‘순서와 친화의 체계’, 묵화담은 숲속에 돌발적으로 솟아난 이물질이 아니라, 원래 그곳에 있었던 바위처럼 풍경의 일부가 되었다.
우리는 이곳이 일종의 ‘쉼’이길 바랬다. 과하지 않은 너그러움으로 자연과 이웃을 포용하며, 충만한 삶의 기운을 누릴 수 있는 일평생의 친구 같은 집. 묵화담은 자연과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모우림의 철학이 오롯이 형상화된 결과물이다.


여백과 중첩의 미학: 종묘(宗廟), 오래된 미래에서 빌려온 침묵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현대적인 침묵은 어디서 오는가. 우리는 그 오래된 미래를 종묘(宗廟)에서 찾았다.
한일(一)자로 늘어선 거대한 정전(正殿)과 그 앞을 비워내는 넓은 월대(月臺). 장대석의 긴 돌과 짧은 돌이 반듯하게 쌓여 만들어내는 소박한 위엄. 그 앞에서 화려한 기교가 닿을 수 없는 ‘침묵의 숭고함’을 떠올린다. 묵화담은 종묘의 건축적 어휘를 21세기 주거 공간으로 과감하게 전이시킨 결과물이었다.
건물의 기단부는 종묘의 월대처럼 단단한 돌마당으로 조성되어 본채와 대지 사이의 긴장을 조율하는 심리적 완충지대가 된다. 조각보처럼 깔린 박석(薄石)의 불규칙한 패턴은 단순한 바닥재가 아니다. 그것은 정지된 공간에 시각적 리듬을 부여하며 ‘여백의 밀도’를 완성한다.
종묘의 침묵은 외형에 그치지 않는다.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한일(一)자 구조는 묵화담의 각 층에 축소되어 깊이 있는 시퀀스로 환원된다. ‘현관-방-거실-주방’이 긴 복도를 따라 독자적인 위계를 가지며 이는 단순한 물리적 배치를 넘어 내부공간을 그 시작과 끝점에서 바라볼 시 점점이 농익는 중첩의 미를 보여주었다.
그 수평의 흐름 끝에 대청(大廳)을 차용한 마루가 놓여있다. 기능의 공간에서 의도적 쉼표를 부여한 ‘비생산적인 공간’에 걸터 앉자 건축은 비로소 배경으로 물러나고 오직 자연만이 들이닥친다. 위압감은 사라지고, 자연과 이웃을 향한 너그러운 포용만이 남아있다. 그렇게 안과 밖, 긴장과 이완이 하나의 호흡으로 연결된다.


차경(借景): 풍경을 액자에 담는 기술
공간의 진가는 내부로 들어섰을 때 배가 된다. 현관에서 복도, 거실, 주방으로 이어지는 긴 동선은 종묘의 회랑을 걷는 듯한 깊이감을 선사한다. 각 공간은 독립적이면서도 복도를 통해 수평적 관계를 맺으며, 시선의 종말에서 겹겹이 쌓이는 공간의 레이어가 한옥이 주는 깊이감을 나타내며 중첩의 미학을 연출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풍경을 다루는 기술이다. 빛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공간 배치, 사방의 빛을 오롯이 품은 창호계획은 전통건축에서 볼 수 있는 ‘차경’ 개념의 연속적인 프레임을 차용하고 있다. 창호의 배치는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내부로 끌어들여 공간의 일부로 이입하며, 각 공간에서 보여지는 그림 같은 풍경은 기존의 산세와 더불어 한국의 미를 표현한 묵화담의 단아한 조경디자인이 한 몫 했다.
특히 안방 창가에 마련된 윈도우 시트(Window Seat)는 한옥의 누마루를 모티브로 디자인되었다. 이곳에 걸터앉아 창밖을 바라볼 때, 유리창 너머의 숲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경험의 주체가 된다. 봄의 연두, 여름의 녹음, 가을의 단풍, 겨울의 설경. 계절이 바뀔 때마다 집은 새로운 그림을 걸어둔 갤러리가 된다. 또한 높은 층고를 자랑하는 거실은 전면의 확트인 창문으로 초록의 숲이 대지를 포근히 감싸는 마을 전경을 수놓는다.



층위(層位): 환대에서 고독으로, 다시 자연으로
공간은 층위(層位)마다 다른 삶의 속도와 밀도를 담는다. 지상 2층과 다락을 포함한 묵화담의 수직적 구조는 환대에서 고독으로, 다시 자연으로 확장되는 하나의 서사를 완성한다.
대지서 이어지는 1층은 타인과 온기를 나누는 환대(Hospitality)의 무대다. 거실과 다이닝룸, 주방은 벽으로 단절되는 대신, 반투명 슬라이드 글라스 도어를 통해 은유적으로 구분된다. 닫으면 독립된 세계가 되고, 열면 거대한 광장이 되는 유연함이다. 주방은 심플한 디자인의 우드 빌트인 가구와 중앙으로 먹색의 아일랜드 조리대가 묵직하게 자리하며 중심을 잡아준다. 이는 단순한 조리 공간이기보다 사람이 모여 이야기가 맥박 치는 ‘집의 심장’임을 웅변한다.
계단을 오르면 공기의 무게는 사뭇 달라진다. 2층은 오직 나에게 집중하는 침묵과 정화(Purification)의 성소다. 가장 내밀한 마스터룸은 단정한 미학으로 휴식의 깊이를 더하고, 숲을 향해 과감히 열린 욕실은 카타르시스의 공간이 된다 . 반신욕조에 몸을 담그고 창 너머 흔들리는 풍경을 응시하는 순간, 육체의 세정을 넘어 자연과 하나의 호흡으로 섞이는 명상의 의식(Ritual)이 완성된다 .
이 고요한 응시는 ‘ㅅ’자 박공지붕 아래 숨겨진 다락에 이르러 유희(Play)와 확장(Expansion)으로 변주된다 . 어른의 비밀기지이자 아이들의 꿈이 자라는 이 여백은 옥상의 텃밭으로 이어지며, 흙을 만지고 씨를 뿌리는 원초적 기쁨을 되살려낸다 . 도시의 아파트가 거세해버린 감각, 하늘과 땅을 동시에 만지는 삶. 묵화담은 그렇게 대지에서 시작된 삶을 하늘로 확장시키며, 주택(House)이라는 물리적 형식을 넘어선 라이프스타일(Life-style)을 제안한다.
[영상출처: 강남코리아 gangnamkorea]
여백(餘白): 침묵으로 쓴 시(詩)
대지는 하얀 화선지였고, 우리는 그 위에 먹을 찍듯 집을 놓았다. 2025년 오늘, 다시 마주한 묵화담(墨畵淡)은 대지 위에 그려진 한 편의 수묵화였다. 먹의 농담(濃淡)처럼 번지는 빛과 그림자,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여백과 충만의 공존. 그것은 소란스러운 도심의 언어가 아닌, 고요한 자연의 언어로 쓴 시(詩)였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과시와 소유로 오독되는 현대의 하이엔드 앞에서, 우리는 이 천년의 미학을 빌려 ‘절제의 품격’을 증명하고자 했다.
설계자를 넘어 번역가로서 종묘(宗廟)의 침묵하는 돌마당을 진입로로, 한옥 누마루의 풍류를 윈도우 시트로, 숲을 차경(借景)으로 들여왔다. 과정은 치열한 조율이었고 이 모든 행위의 본질은 하나다. “이 공간이 거주자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묵화담은 거주자에게 말을 건넨다. 때로는 멈춰 서서 흔들리는 잎사귀를 바라보라고.
건축가가 물러난 자리에는 비로소 삶이 들어선다. 묵화담은 모우림 철학의 정점이자 새로운 사유의 시작점이었다. 이제 이 단단한 그릇을 채우는 서사는 오롯이 거주자의 몫이다. 다만 바라는 것은 하나. 과하지 않은 너그러움으로 곁을 지키는 일평생의 친구 같은 집으로 남아주기를. 시간이 흐를수록 낡지 않고 먹색처럼 은은하게 익어가, 삶을 가장 아름다운 그림으로 완성하는 배경이 되기를 소망한다.
[Project Scope] 단순한 건물이 고유한 ‘브랜드’가 되기까지.
묵화담 단독주택 건축 프로젝트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 고유한 언어와 표정을 입히는 통합 브랜딩의 과정이었습니다.
- Concept Planning: 건축 기획 및 공간 철학 도출
- Brand Storytelling: 네이밍(Naming) 및 브랜드 세계관 구축
- Arch-Editorials: 채널 기획/운영 및 건축 비평·에세이 발행
- Brand Design: BI, 브로셔, 현장 배너 및 어플리케이션 디자인
- Space Directing: 샘플하우스 콘셉트 기획 및 공간 연출(VMD)
건축은 공간을 짓고, 기획은 가치를 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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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Architect, EOM YONG SUN
삶의 밀도를 짓고, 시간의 결을 수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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