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이라는 이름 뒤에 숨은 비인격적 합리성에 관한 고찰

차가운 새벽, 터미널의 노부부
수년 전 새벽, 용인터미널의 공기는 지독하게 차가웠다. 목적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버스의 기다림에 행여나 놓칠까 출발 시간과 플랫폼 번호를 연신 확인하고 있었다. 겨울 바람이 무섭도록 살을 애는 추위였다. 하루에 네 대밖에 운행하지 않는 버스로 기억한다. 그래서 늘 만원이었으리라. 그때 어디선가 노부부의 동동거림이 느껴졌다. 일찍 나오면 표를 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서둘러 집을 나섰다고 했다. 무려 출발 한 시간 반 전에 도착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표는 없었다.
미리 예매를 하지 그랬느냐는 직원의 말은 부질없었다. 표는 으레 현장에서 직접 돈 주고 구입하는 것인 줄로만 알던 세대였다. 노부부에게 ‘인터넷 예매’라는 인터페이스는 보이지 않는 벽이었다. 상황은 엿가락처럼 늘어져 질척함만 가중되었다. 그들의 통사정에도 사실 직원이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마지못해 돌아서는 노부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우리 엄마 아빠, 혹은 내 미래의 초라함을 엿본 것 같아 몹시 화가 났다.
이름이 지워진 자리, 번호로 불리는 인간
켄 로치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며 수 년 전 터미널에서 마주했던 노부부를 떠올린다. 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인 인간의 무기력함이 이토록 쓸쓸할 수 없음을 기억한다. 심장병으로 일을 쉴 수밖에 없는 목수 다니엘은 복지 혜택을 위해 관료제의 미로에 던져지지만, 체크리스트에서 ‘근로 가능’으로 분류된 그를 맞이하는 것은 일말의 인정도 찾을 수 없는 ‘정확한 AI의 음성’과 무한 반복되는 절차뿐이다. 국가는 존재하지만, 그 안에서 인간은 더 이상 이름이 아닌 보험 번호나 화면 속의 점으로 치환된다.

이 영화는 단순한 가난의 기록이 아니다. 효율을 명분으로 인간을 의심하고, 통제하고, 끝내 탈락시키는 시스템에 대한 고발이다. 시민의 당연한 권리였던 복지가 사회의 가장 취약한 사람을 가려내어 탈락시키도록 설계된 오디션 장으로 변질되었다. 무대 위 참가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실패를 호소한다. ‘증명해야만 얻을 수 있는 시혜’의 무대에서 다니엘의 심장은 멈춰가고 있지만, 효율의 가면을 쓴 심사위원의 채점표는 그를 ‘일할 수 있는 몸’이라 선언한다. 절차는 완벽하게 작동했으나, 그 안에 인간 실존은 부재하다.
콜센터의 알고리즘적 판단은 중립의 가면을 쓰고 책임을 분산하며 도덕적 판단을 회피한다. 담당 공무원의 시선은 잠시 다니엘에게 머물렀으나 이내 모니터 속 메뉴얼을 응시했다. 개인적인 악의라곤 없이 그저 주어진 절차를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무감정한 응대는 차라리 모욕을 주었더라면 울분을 토하기라도 했을 테다. 다정에는 미치지 못한, 교묘한 친절 앞에 다니엘의 존엄은 힘을 잃었다. 그 비인격적인 합리성의 총합은 역설적으로 한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국가는 사라지지 않았으나 인간을 보지 않는 기계가 되었고, 다니엘의 분노는 그 비정한 시스템 앞에서 존엄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저항의 언어로 남는다.

낙서로 쓴 존엄
다니엘은 컴퓨터를 다루지 못한다. 그것은 능력 부족이 아니라 접근성 결핍이다. 디지털 전환이 공정성을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음을 영화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온라인으로만 접수 가능한 신청서, 자동응답 시스템의 무한 대기, ‘알파고 음성’의 무한 반복. 일말의 인정은 찾을 수 없다.
새벽 터미널의 노부부도 마찬가지였다. 인터넷 예매라는 시스템은 그들에게 열려 있지 않았다. 효율적인 제도가 누군가에게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된다.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누가 설계하고 누구를 위해 작동하느냐에 따라 포용의 도구가 되기도, 배제의 기제가 되기도 한다.

제도의 언어가 인간의 고통을 담아내지 못할 때, 다니엘은 복지사무소 벽에 스프레이로 자신의 이름을 새긴다. 주디스 버틀러의 언어로 말하자면, 제도적 언어가 실패했을 때 등장하는 도덕적 저항이다. 말할 권리가 박탈될수록, 몸과 분노가 언어가 된다. 그의 낙서는 범죄가 아니라 마지막 목소리였다. 이것은 분노 조절 실패가 아니다. 영화는 분노를 시민적 감정으로 복권한다. 존엄을 요구하는 인간의 마지막 언어로서의 분노. 제도가 인간을 번호로 환원할 때, 이름을 외치는 것은 정치적 행위가 된다.
효율이 지워버린 인간의 얼굴
영화는 이 비정한 시스템에 대항할 거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다니엘과 케이티의 우정, 이웃의 도움, 푸드뱅크에서 마주친 낯선 이들의 눈빛 같은 일상적 연대의 순간들을 묵묵히 보여준다.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은 서로의 존엄을 잠시나마 회복시켜 주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케이티가 생존을 위해 선택해야 했던 성적 노동은 개인의 타락이 아닌 구조적 강요가 빚어낸 비극이며, 거대한 국가 시스템이 실패한 자리에 남는 것은 이웃 간의 우정과 연대 같은 미시적인 온기 뿐이다.


용인터미널의 노부부는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다음 버스를 기다렸거나, 느린완행을 타고 목적지에 닿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날의 약속을 포기했을지도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 시스템이 그들을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진정으로 견고한 사회적 설계는 효율이 아닌 ‘배려와 소통’을 주춧돌로 삼아야 한다. 배려 없는 정책은 허울만 요란한 탁상행정일 뿐이다.
비인격적 합리성의 총합은 결국 다니엘을 쓸쓸한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다니엘이 끝내 살아서 전하지 못하고 장례식 추도문으로 남겨진 진술서는 효율적인 제도가 인간에게 남긴 가장 비정한 유산이자 우리가 새로 써 내려가야 할 존엄의 표준을 제시한다. 낡은 기록을 다듬어 현재의 성찰을 세우듯, 우리 사회의 설계도에 ‘인간’이라는 가장 본질적인 자재를 다시 채워 넣는 일이야말로 효율이라는 이름 뒤에 숨은 비인격성을 걷어내고 인간의 얼굴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내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입니다.
십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2016년, 용인터미널의 새벽을 지십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2016년, 용인터미널의 새벽을 지배했던 그 서늘한 배제는 2025년의 일상 속에서 더욱 정교하고 매끄러운 형태로 진화했다. 우리는 여전히 각자의 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누군가는 여전히 인터페이스의 장벽 앞에서 소외된다. 과거 ‘보험 번호’라는 숫자에 가로막혔다면, 이제는 알고리즘의 변수나 데이터의 파편으로 분해되어 검색 엔진과 AI의 판단 아래 놓인인 ‘디지털 배제’를 마주한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의 점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한 명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내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입니다.’
효율이라는 명분이 더욱 공고해진 2025년, 화면 속의 점이 되기를 거부했던 한 남자의 목소리를 다시 호출한다. 그의 투쟁은 화면 속의 점으로 치환되기를 강요받는 이 시대에 여전히 유효한, 아니 더욱 절박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2016년의 나는 “이대로는 안 된다, 행동하자”고 외쳤다. 2025년의 나는 그 외침 위에 “시스템은 언제쯤 인간의 얼굴을 할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얹는다. 기술의 속도가 거세지고 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노부부의 동동거림은 키오스크의 장벽 앞에 가로막힌 누군가의 뒷모습으로 끊임없이 치환된다.
제 3의 손을 자처하는 스마트폰을 켜자 그 속에는 편의성을 미덕으로하는 수많은 어플리케이션이 자리한다. 그 뺴곡한 정렬위로, 다니엘을 응대하던 ‘정확한 AI’의 음성이 마치 전시(戰時)의 모스부호처럼 오버랩된다. 시스템이 설계한 완벽한 절차 속에 정작 ‘사람’이 머물 자리가 없다면, 그 효율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지워진 사람들의 이름을, 이제는 우리가 불러야 할 때다.
※ 이 글은 2016년, 작성된 영화 감상을 2025년의 시선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Invitation]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도, 당신의 삶은 계속됩니다.
스크린 속 허구가 아닌, 삶이라는 리얼리티를 응시합니다.
영화 속 공간과 서사에서 길어 올린 인문학적 통찰(Insight)을 통해, 무심코 흘려보낸 당신의 일상을 재해석할 새로운 시선을 제안합니다.
- For Seekers: 줄거리 요약이 아닌, [삶의 본질]을 관통하는 깊이 있는 사유가 그리운 분.
- For Creators: 익숙한 장면을 낯설게 바라보며 새로운 [영감의 원]을 찾고 싶은 창작자.
- For Dreamers 영화 같은 삶을 꿈꾸지만, 현실의 [구조와 방향]을 고민하는 모든 주인공.
삶이라는 영화의 편집권은 오직 당신에게 있습니다.
이 기록이 당신의 다음 씬(Scene)을 기획하는 데 작은 영감이 되기를 바랍니다.
취향의 서재는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Life Architect, EOM YONG SUN
삶의 밀도를 짓고, 시간의 결을 수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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