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에도 묵묵히 돌아가는 윤전기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좁은 골목을 가득 채운 잉크 냄새와 종이 냄새는 충무로 인쇄골목이 여전히 ‘물성(物性)’을 만드는 거대한 공장임을 증명한다. ‘수지’라는 단어에서 첫사랑이 아닌 종이를 떠올리고, 기계 소리에 맞춰 심장이 뛰는 곳. 겉보기엔 미로처럼 복잡하고 거칠지만, 그 안에는 땀 흘려 일하는 노동의 신성함과 사람 냄새 나는 B급 유머가 살아 숨 쉬고 있다.
Project: 골목길 아카이빙 매거진 <잼이路> Vol.3
Location: 서울시 중구 인현동·필동 인쇄골목 일대
Concept: 물성(物性)을 만드는 손의 기록, 노동과 생존의 미학
Format: 920mm X 160mm Accordion Fold (병풍 접지 / 12p)
Credit: Publisher 엄턴구리 / Editor 노갱, 삐딱진택진, 엄턴구리, 신주현 외
Period: 2015. 3 발행
미로 같은 골목, 잉크 냄새에 취하다.

[Director’s Note] 기계가 멈추면, 우리도 멈춘다
“길 위에 있다. 그 길을 걷는다. 사소한 관찰은 낱말이 되고, 소소한 탐닉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서울의 심장부에 숨겨진 또 하나의 도시, 미노스 궁의 미로처럼 얽힌 골목마다 인쇄소들이 알알이 박혀 있다. 모세혈관의 정교함을 떠올리는 가지치기마다 종이를 실어 나르는 삼륜 오토바이의 시동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거리에 인이 박힌 화확 약품 냄새가 코끝을 파고들어 뇌혈관을 헤집는다. ‘도무송’, ‘오시’, ‘행택’ 도무지 의미를 알 리 없는 낯선 단어들이 벽면을 빼곡히 도배하는 풍경은 대놓고 치열함을 드러낸다.


2015년 3월, 우리가 세 번째로 소환한 골목은 ‘충무로 인쇄거리’다. 종이와 잉크, 기름때와 땀 냄새가 뒤엉킨 노동의 현장, ‘착-착-착-착’ 기계 소음은 존재의 증명이자 생존의 리듬이다. 인쇄 산업의 쇠퇴로 열에 일곱은 문을 닫은 형국에서 그것은 드문드문 간신히 명맥을 이어간다. 그곳에서 우리는 기계 소리에 맞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불황의 그늘 아래서도 서로에게 인사를 건네고, 낡은 변기 위에서도 삶의 온기를 나누는 사람들. <잼이路> Vol.3는 디지털 시대에 손으로 물성을 빚어내는 이들의 치열한 ‘버팀’을 기록한다.
미로 같은 골목에서는 길을 잃기 쉽상이었다. 우리는 우왕좌왕의 틈을 타 ‘석굴암 커피숍’을 발견하고, ‘매일온천’에서 온천수의 진위를 따지고, 콜라텍 ‘충무로 찬찬찬’ 앞에서 오줌을 참았다. 그 혼란과 현기증 속에서 우리가 포착한 것은 폐부 깊숙한 ‘날것의 삶’이다. 접착과 집착 사이를 오가는 철학적 수다, 잠들어 있는 세 마리 오징어를 바라보며 떠올린 노동의 역사, 태국 방콕의 이봉원을 닮은 오토바이 기사와의 우연한 조우. 충무로는 그렇게 B급의 유머와 서민의 애환이 공존하는 기묘한 텍스트가 되었다.
[Archive] 착- 착- 착- 착-, 일곱 개의 시선으로 읽는 충무로
잉크의 기록: 냄새로 읽는 노동
인쇄골목의 본질은 시각이 아니라 후각에 있다. 잉크와 종이, 본드와 기름이 뒤섞인 냄새는 이곳이 여전히 ‘손으로 물성을 빚어내는 현장’임을 증명한다. 이 섹션에는 충무로의 냄새를 따라가며 노동의 의미를 사유한 글들을 모았다.
<잠들어 있는 세 마리의 오징어를 깨우는 방법>

이 글은 ‘소음의 부재’를 통해 역설적으로 노동의 존재론을 질문한다. 필자가 포착한 것은 기계 소리가 아니라 그것이 멈췄을 때 드러나는 침묵의 무게다. “기계가 돌아가지 않으면 일꾼들도 심지어 사장님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문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존재가 노동과 얼마나 깊이 결박되어 있는지를 담담하게 드러낸다.
19세기 러다이트 운동을 경유하여 현재의 불황으로 귀결되는 서술 구조는 개인의 관찰을 역사적 맥락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나 이 글의 진정한 힘은 관념이 아니라 이미지에 있다. “대낮부터 잠들어 있는 어느 횟집 수족관 속 세 마리의 오징어”라는 첫 문장은 불황의 풍경을 단 하나의 정물로 압축한다. 오징어의 잠은 골목의 잠이고, 그것을 깨우는 것은 결국 기계의 굉음이다. 버텨내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는 사람들의 기도가 여기에 있다.
<충무로는 맛있다>

필자는 세계를 ‘맛’으로 인식하는 공감각자의 시선을 빌려 충무로를 해석한다. “찹쌀떡처럼 쫀득한 목소리”, “오래도록 졸인 단팥 맛”과 같은 표현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세계를 감각하는 사람의 고백이다.
“어릴 적 짝에게 ‘넌 멸치조림 맛이야’라고 했다가 부모님이 학교에 불려 오신 적이 있다”는 문장에는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한 감각의 고독이 담겨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 고독을 한탄하지 않는다. “이후로 절대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사실 세상은 온갖 맛들로 가득 차있다”고 담담히 선언할 뿐이다. 충무로가 ‘나박김치 맛’이라는 결론은 기이하면서도 정확하다. 시원하고 칼칼하며 어딘가 허름한 맛. 인쇄골목의 본질을 이보다 더 잘 포착한 문장이 있을까.
미로의 기록: 간판으로 읽는 풍경
충무로 인쇄골목의 지형은 미노스 궁의 미로를 닮았다. 길을 잃는 것이 이곳을 경험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 섹션에는 골목의 미로를 헤매다 발견한 기묘한 간판들, 그리고 그 간판이 품고 있는 이야기들을 모았다.
<기가 막힌 충무로>


이 글은 충무로 탐험기의 형식을 빌려 B급 감수성의 정수를 보여준다. ‘석굴암 커피숍’, ‘매일온천’, ‘충무로 찬찬찬’ 같은 간판들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이끌려 문을 두드리는 과정은 마치 인디아나 존스의 모험처럼 서술된다. “다이너마이트를 챙겨왔어야 했나”라는 농담은 과장되었지만 유쾌하다.
글의 후반부는 갑작스러운 에로티시즘으로 전환된다. 진양상가 계단에서 마주친 여인에 대한 묘사는 노골적이지만, “쳐다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달콤했으니까”라는 영화 인용으로 마무리되며 관음의 욕망을 고백과 체념의 서정으로 승화한다. 깊이보다 속도를, 사유보다 감각을 선택한 글이지만, 그 선택이 일관되게 유지된다는 점에서 자기완결적이다.
<매일온천>

에디터는 ‘매일온천’이라는 간판에 이끌려 문을 연다. 서울에 온천이 있나? “여기 정말 온천인가요?” “온천물만큼 좋아요.” “수돗물이라는 거죠?” “물이 엄청 좋아요.” 대화는 평행선을 달리고, 에디터는 “이런 옘병!”을 내뱉으며 문을 나선다. 발견에서 멈춘 스케치지만 이 짧은 에피소드에는 충무로의 언어가 담겨 있다. 질문을 피해가며 본질을 숨기는 화법, 허세와 생존 사이 어딘가에 있는 간판의 수사학이 엿보인다.
<수지맞은 충무로간지>


충무로 인쇄골목을 인도 델리의 ‘빠하르간지’, 홍콩의 ‘청킹맨션’에 비유하는 것으로 글은 시작한다. 에디터의 넓은 시선을 엿볼 수 있는 흐름에서 삼륜 오토바이의 생태계, 지게차의 제조사별 색상 차이, ‘특수지’라는 단어에서 ‘수지’를 연상하는 언어유희까지. 정보와 관찰, 유머가 균형 있게 배치되어 있다. 특히 “이매진, 페스티발, 매직터치, 매직칼라, 뉴하이크림”이라는 특수지 이름들을 나열하며 “마법 기술 같은 이름들”이라 코멘트하는 부분은 인쇄업계의 언어가 가진 묘한 판타지를 포착한다.
본드의 기록: 관계로 읽는 철학
인쇄골목에는 종이와 종이를 붙이는 본드 냄새가 가득하다. 접착(接着)은 이 골목의 물리적 원리이자 은유다. 이 섹션에는 충무로에서 발견한 ‘붙음’과 ‘이어짐’의 서사들, 사물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사유를 모았다.
<접착과 집착에 관한 한 끗 수다>


‘접착’과 ‘집착’이라는 두 단어의 유사성에서 출발하는 이 글은 언어유희를 철학적 사유로 확장하려는 시도다. 사전적 정의, 설문조사 인용, 개인적 경험담, 걸그룹 핑클의 에피소드까지 다양한 소재를 끌어온다. “낮술에 취해 아리까리 눈동자가 순간 착시를 불러왔으니 ‘삼진집착’이라 보이는 그 앞에서”라는 도입부는 위트 있다.
접착제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붙이는 존재, 집착이 소유욕으로 변질되는 과정, “진리는 언제나 그 반대의 개념에서 설명된다”는 통찰. 소재의 폭이 넓어 초점이 분산되는 경향이 있지만, “농익은 본드 냄새는 사람을 이토록 취하게 한다”는 결문이 흩어진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는다.
<충무로 이봉원>


에디터는 충무로의 오토바이 기사에게서 태국 방콕의 ‘툭툭’ 기사를 본다. 몇 해 전 여행지에서 만났던 이봉원 닮은 남자. “태워 줄게요”라는 말 한마디에 낯선 도시의 밤이 환해졌던 기억을 소환하며, “달큰한 공기 속을 가르는 오토바이 뒤에서 머리카락을 속속들이 흩트려 놓는 바람을 맞으며 그녀는 그 날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는 문장은 해방감을 감각적으로 전달한다.
직장에서 타박받는 여성 화자, 미로에서 길을 잃은 상황, 구원자처럼 등장하는 이봉원. 서사 구조는 예측 가능하지만, “충무로의 좁은 골목 안, 지뢰처럼 산재한 인쇄물들과 요상한 행인들의 눈빛을 헤치며 가는 지금,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있다”는 결문이 장면을 완성한다. 낯선 골목에서 낯선 사람의 친절이 만들어내는 작은 구원. 이것이 에디터가 충무로에서 발견한 관계의 순간이다.
2026’s Note: 잉크 냄새는 사라지지 않는다.

손글씨가 정서적 충만감을 준다는 볼맨 소리는 20세기에나 유효하다. 21세기에 와서 이 비교는 인쇄물과 태블릿을 대상으로 한다. 하물며 2046년에는 글자 자체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는 억측도 나온다. 생각을 전기신호로 전달하거나 홀로그램이 시각 이미지만으로 내용을 이해시키는 시대. 그때가 오면 충무로 인쇄골목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곳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것은 무엇일까. 청첩장일까. 연하장이나 달력. 택배상자나 쇼핑백. 최후의 생존자가 책이길 바라지만, 확신할 수 없다.
물성(物性)에는 디지털이 대체할 수 없는 무엇이 있다. 종이를 넘기는 손끝의 감촉, 잉크가 스며든 면의 냄새, 인쇄물을 손에 쥐었을 때 느껴지는 무게. 그것은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존재의 확인이다. 내가 여기 있고, 이것이 여기 있다는 물리적 증거. 스크린 위의 픽셀은 사라지지만, 종이 위의 잉크는 손끝에 남는다. 그것이 인쇄의 본질이고, 충무로가 버텨온 이유다.
2015년 봄, 우리가 이 골목에서 채집한 것은 잉크 냄새에 절은 노동의 신성함이었다. 석굴암 커피숍의 닫힌 철문, 매일온천의 “물이 좋다”는 대답, 콜라텍 찬찬찬의 뽕짝 비트. 그 모든 것들이 미로 같은 골목에 켜켜이 쌓여 충무로만의 독특한 체취를 만들어냈다. 기계가 멈추면 우리도 멈춘다고, 버텨내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잠들어 있는 오징어 세 마리를 깨울 날을 기다린다고. 그렇게 각자의 문장을 써내려간 에디터들의 손끝에도 잉크 냄새가 배어 있었다.
10년이 지난 2026년, 충무로 인쇄골목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숨을 쉬고 있다. 디지털 인쇄가 오프셋을 대체하고, 온라인 주문이 발품을 대신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좁은 골목에는 여전히 삼륜 오토바이가 종이를 싣고 오가며, 농익은 본드 냄새가 사람을 취하게 한다. 열에 일곱이 문을 닫았던 그 시절, 그 남은 셋이 여전히 기계를 돌리고 있다. 착- 착- 착- 착- 소리는 존재의 증명이자 생존의 리듬이다.
물성의 시대는 끝이 아니라 변화하고 있다. 대량생산의 효율에서 손으로 만진 것의 희소함으로. 정보의 전달에서 존재의 확인으로. 충무로 인쇄골목이 살아남는다면, 그것은 효율이 아닌 ‘물성을 빚어내는 손’에 대한 믿음 때문일 것이다. 기계가 종이를 뽑아내고, 사람이 그것을 접고, 누군가의 손에 전해지는 과정. 거기에는 알고리즘이 계산할 수 없는 온기가 있다.
골목을 채우는 우렁찬 기계 소음이 곤히 잠든 저 세마리의 오징어를 깨우는 날, 충무로는 여전히 ‘나박김치’ 맛으로 발음될 것이다. 시원하고 칼칼하며, 어딘가 허름하지만, 그래서 정직한 맛. 착- 착- 착- 착-. 기계 소리가 들린다. 아직 끝이 아니다.
“사소한 관찰은 낱말이 되고, 소소한 탐닉으로 이야기는 완성된다.”
[프로젝트 전체 보기] 도시의 문장을 수집하다, 독립잡지 <잼이路>
※ 이 글은 2014~2015년 도시의 골목을 기록했던 독립잡지 <잼이路>의 여정을 2026년의 시선으로 소환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Collaboration] 공간과 브랜드의 서사를 설계합니다.
단순한 홍보가 아닌, 브랜드가 지닌 ‘대체 불가능한 이야기’를 기획합니다.
도시의 골목을 아카이빙하던 에디터의 시선으로, 브랜드 헤리티지(Heritage)를 단단한 텍스트로 구축해 드립니다.
- Urban & Space Archiving: 공간이 가진 역사성과 맥락을 인문학적 시선으로 해석하여 브랜드 스토리로 치환합니다.
- Micro-History Storytelling: 거창한 역사가 아닌, 소비자가 공감할 수 있는 미시적이고 감성적인 서사를 설계합니다.
- Editorial Leadership: 기획부터 취재, 제작까지. 하나의 완결된 콘텐츠 시리즈를 총괄하는 에디토리얼 솔루션을 제공합니다.
“모든 브랜드엔 말하지 않은 문장이 있습니다. 그 문장을 찾아드립니다.”
Life Architect, EOM YONG SUN
삶의 밀도를 짓고, 시간의 결을 수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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