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화려함에서 탈락한 것들은 어디로 갈까. ‘신세기’라는 이름의 낡은 약국과 ‘7900원’짜리 월세방.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바닥에서, 우리는 비로소 서로의 가장 초라한 얼굴을 마주한다. 부평 묏골마을의 낡은 슬레이트 지붕과 미로 같은 골목은 쓸쓸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서로의 결핍을 보듬으며 살아가는 따뜻한 온도가 남아 있다. 실패한 꿈과 고단한 청춘들이 잠시 숨을 고르는 곳, 도시와 시골의 경계에서 소박한 삶의 비망록을 발견한다.
Project: 골목길 아카이빙 매거진 <잼이路> Vol.4
Location: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 묏골마을 일대
Concept: 느린 시간의 지층, 공간이 촉발한 문학적 상상
Format: A1 타블로이드 (Tabloid / 양면)
Credit: Publisher 엄턴구리 / Editor 로미, 하지마윤, 엄턴구리 외
Period: 2015. 4 발행
도시의 속도에서 비껴난 곳, 다른 시간이 흐르는 마을

[Director’s Note] 느린 시간을 사는 사람들 사이로 걸어 들어가다.
“길 위에 있다. 그 길을 걷는다. 사소한 관찰은 낱말이 되고, 소소한 탐닉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부평역에서 걸음을 옮긴다. 중심 상권에서 멀어질수록 길은 세분화 된다. 좁고 복잡한 골목에 접어들자 눈 앞으로 박제된 시간의 풍경이 펼쳐진다. 도시의 재촉에 익숙해진 육체는 이 느린 세계 앞에 잠시 현기증을 느낀다. 퍼뜩 정신을 차리자. 다만 더딘 시간의 흐름일 뿐이다.
2015년 4월, <잼이路>가 네 번째로 소환한 골목은 인천 부평구 십정동 ‘묏골마을’이다. 일제강점기 군수공장의 노동자 숙소로 시작된 마을이다.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이곳은 해방 후 미군 부대, 자동차 공장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긴 세월 마을은 도시의 가장자리에 있었다. 중심부가 지나쳐버린 시간들이 이곳에 켜켜이 쌓여 지층이 되었다.
골목을 걷는다. ‘신세기 약국’이라는 간판이 눈에 띈다. 신세기라니, 어딘가 비릿한 피냄새가 맴돈다. 좁은 골목에는 색색의 빨래가 나부끼고, 창틀에는 아무렇지 않게 편지가 끼워져 있다. 문을 열면 맞은편 집의 현관문이 바로 보이는 거리. 이곳에서 이방인은 쉽게 눈에 띈다.
“이거 왜 찍으세요?”
날 선 물음에 그대로 얼어붙는다. 셔터에 닿은 손가락도 채 떨구지를 못했다. 기록이라는 명분은 입 안에서 맴돌 뿐 소리가 되진 못했다. 찰나의 정적에 비로소 묻게 된다. 우리는 대체 이곳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가. 누군가의 사적인 삶을 훔쳐보는 관음증 환자와 사라져가는 시대의 마지막 숨결을 받아 적는 기록자는 사실 따지고 보면 매한가지다.
묏골마을의 골목은 단순한 통로가 아니다. 그것은 마당을 대신하는 공유의 공간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치고, 서로의 안부를 알고, 열린 문 사이로 대화가 흘러나온다. 이곳의 삶은 화려하지 않지만, 그 자체로 단단히 이어지고 있다. <잼이路> Vol.4는 이 마을이 품고 있는 시간의 켜와, 그 공간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킨 문학적 상상을 기록한다.
[Archive] 바닥에서 올려다본 하늘, 다섯 개의 시선
추락의 기록: 밀려난 자들의 심연
도시의 화려함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가. 이 섹션에는 삶의 바닥으로 밀려난 자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들이 마주한 것은 절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의 가능성이다.
<경수, X팔리다>

“밀리고 밀려 결국은 축축한 늪지대로 처박히고, 살고자 발버둥 치면 칠수록 손에 잡히는 건 맥없는 지푸라기 뿐이었다.”
에디터는 경수의 몰락을 통해 도시 뒷골목의 존재론을 질문한다. 대한민국 ‘최고’대 ‘법학’과에 입성했던 청년이 일곱 번의 사법시험 실패 끝에 도심의 뒷골목으로 흘러들어온다. 존재의 무게만큼 하찮은 지푸라기의 부력은 절실함을 이기지 못한다. 화려함에 반하는 도시의 이면, 그 심연의 끝에 묏골마을 같은 골목이 자리한다. 단 한 문단으로 한 인간의 추락을 응축한 이 글은,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 너머 존재의 무게를 묻는다. 경수가 X팔린 곳, 그곳은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안식처이기도 하다.
<신세기를 사는 그와 그녀의 이야기>


“‘죽음’이 ‘희망’이 되어버린 현실, 그런 신세기에 치국이 살고 있다.”
수면제를 구하러 약국을 전전하는 청각장애인 치국과 이혼 당일 약국을 지키는 약사 지민. 두 사람의 만남은 기묘한 연대로 이어진다. 자살하려는 사람의 얼굴에 ‘나 자살해요’는 선명한 볼드체라는 문장은 섬뜩하면서도 정확하다. 그러나 이 글의 진정한 힘은 두 사람 사이에서 피어나는 이상한 위로에 있다. “그것은 치국에게 전하는 말인 동시, 지민 자신에게 전하는 간곡한 설득이기도 하다.” 죽음을 매개로 삶을 말하는 역설, 바닥에서만 가능한 연대의 방식이 여기에 있다.
예지의 기록: 죽음을 보는 남자
묏골마을에는 기이한 능력을 가진 남자가 산다. 그는 곧 죽을 사람을 느낀다. 이 섹션에는 마을의 역사와 함께 축적된 죽음의 기억, 그리고 그 기억을 몸으로 감당하는 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의자 위의 남자>

“사람이 원래 이렇게 쉽게 죽는 것인 줄 알았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남자는 몇 년 전부터 곧 죽을 사람이 누구인지 느껴지기 시작했다.”
119 상황실 직원 대운과 33년간 신고 전화를 해온 묏골마을 남자의 이야기. 에디터는 삼겹살 굽는 장면과 죽음의 예감을 병치시키며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를 교란한다. 일제강점기부터 미군 부대, 자동차 공장까지 이어지는 마을의 역사가 한 남자의 몸에 새겨진다. 폭발사고로 죽고, 깔려 죽고, 맞아 죽고, 분신하는 사람까지. 남자는 옥상 위 의자에 앉아 동네를 내려다보며 오늘 죽을 사람을 골라낸다. “오늘은 그 ‘느낌’이란 것이 평소와는 달랐다.” 멀어지다 가까워지는 사이렌 소리로 끝나는 이 글은, 묏골마을이 품고 있는 역사의 무게를 한 남자의 육체에 응축시킨다.
기억의 기록: 골목에서 만난 나
시간이 멈춘 골목에서 사람들은 과거의 자신과 마주한다. 이 섹션에는 묏골마을의 풍경이 불러일으킨 개인적 기억들, 그리고 그 기억을 통해 발견하는 삶의 의미를 담았다.
<이거 왜 찍으세요?>

“세월을 잡고 있는 골목 풍경을 헤매다 보면 그동안 잊고 있던 소중한 추억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에디터는 손을 잡고 지나가는 형제의 뒷모습에서 어린 시절의 자신을 발견한다. 동생을 업고 언덕을 오르던 기억, 골목대장 집에 가려고 뛰던 기억. “내가 녀석을 징그럽게 챙겼을 때가 있었구나.” 이제는 귀여운 구석이라곤 찾을 수 없는 동생을 떠올리며 웃음이 난다. “이거 왜 찍으세요?”라는 날 선 질문에 대한 답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기록은 타인의 삶을 훔쳐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거기 정아가 있었다>

“반쯤은 그리움 반쯤은 두려움을 자아내는 묏골마을의 텅 빈 시장, 그곳의 부서진 집들 사이 작은 간판으로 ‘정아식당’ 네 글자가 뚜렷하다.”
버스에서 우연히 마주친 제자 정아의 기억이 묏골마을의 정아식당으로 이어진다. 기말고사 후 꿈을 물었을 때 유일하게 “디자인 하고 싶어요”라고 답했던 학생. 두꺼운 안경 너머 맑았던 눈빛. 에디터는 낯선 골목의 식당에서 그 눈빛을 다시 떠올린다. 바구니 가득한 감자, 양이 많은 닭볶음탕, 마음이 따스해지는 맛. “그날, 버스에서도 이렇게 웃음이 나왔었다.” 이름의 우연한 일치가 과거와 현재를 잇는다. 동명이인이지만, 혹은 동명이인이기에 가능한 정서적 연결이다.
공동체의 기록: 마당을 잃은 사람들의 연대
현대 도시에서 마당은 사라졌다. 그러나 묏골마을에서는 골목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이 섹션에는 공유된 공간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서사를 담았다.
<마당과 골목에 관한 고찰>

“이곳은 골목을 공유한다. 문을 열면 골목 사이로 맞은편 집의 현관문을 마주한다.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골목에서 마주칠 것이다.”
에디터는 어릴 적 다섯 집이 공유하던 마당의 기억을 소환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주치고, 옆집 아이 생일을 알고, 부모님이 안 계실 때 이웃집에서 밥을 먹던 시절. 중학교에 올라가며 빌라로 이사했고, 마당을 공유하던 주택들은 하나둘 사라졌다. 그런데 묏골마을에서 그 마당이 골목의 형태로 살아 있다. 창틀에 끼워진 편지, 골목을 점령한 빨래, 살짝 열린 문 사이로 흘러나오는 대화. “골목에서 힘껏 외치고 싶다. ‘얘들아~놀자~~’” 잃어버린 것을 발견하는 순간의 감격이 짧은 문장에 응축되어 있다.
타블로이드, 지도처럼 펼쳐지는 마을의 단면


<잼이路> Vol.4는 A1 타블로이드 판형으로 제작되었다. 이전 호들이 920mm 아코디언 북으로 좁고 긴 골목의 선형을 표현했다면, 이번 호는 마을 전체를 한눈에 조망하는 방식을 택했다. 묏골마을은 단순한 골목이 아니라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의 역사가 켜켜이 쌓인 하나의 ‘지역’이기 때문이다.
펼치면 A1 사이즈의 대형 판형 위로 마을의 단면이 선명하다. 뒤집으면 다른 한쪽 면에는 에디터들의 글이 모자이크 배열로 배치되어 있다. 접으면 신문처럼 손에 들고 읽을 수 있고, 펼치면 벽에 붙여두고 마을의 인상을 조망할 수 있다.
흑백 사진은 이전 호와 마찬가지로 유지되었다. 색채를 배제한 것은 독자가 자신의 감상으로 그 여백을 채색하기를 바라는 의도다. 거친 입자감의 흑백 톤은 시간이 멈춘 묏골마을의 쓸쓸하고도 소박한 정서를 담담하게 전달한다.
2026’s Note: 지층 위에 새겨진 발자국들


도시에는 서로 다른 속도로 흐르는 시간이 있다. 어떤 곳은 빠르게 변하고, 어떤 곳은 천천히 변한다. 묏골마을은 후자에 속하는 곳이다. 중심부가 지나쳐버린 시간들이 이곳에 켜켜이 쌓여 지층이 되었다고, 우리는 그렇게 썼다. 그런데 지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과거가 묻힌 곳이 아니다. 누군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땅이다.
2015년 봄, 우리가 이 골목에서 채집한 것은 공간이 불러일으킨 상상의 조각들이었다. ‘신세기 약국’이라는 간판에서 치국과 지민의 이야기가 태어났고, 옥상 위 의자에서 33년간 마을을 내려다본 남자의 이야기가 피어났다. 손을 잡고 걸어가는 형제의 뒷모습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났고, 골목을 공유하는 삶의 방식에서 잃어버린 마당을 발견했다. 낡은 골목은 에디터들의 상상의 불씨를 지폈다. 그 상상의 나래가 향하는 방향을 들여다보면 공간이 품고 있는 시간의 결이 드러난다. 신세기라는 이름에서 비릿한 피냄새를 맡았다고 썼던 그날, 우리는 이 마을의 지층 속에 무엇이 묻혀 있는지 상상하고 있었다.
“이거 왜 찍으세요?”
어쩌면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애초에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셔터를 누르기 전 멈칫거린 그 순간, 손가락이 얼어붙은 그 찰나가 이미 하나의 답이었다. 기록한다는 것은 대상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 앞에서 멈추는 것이다.
2026년, 묏골마을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신세기 약국’의 간판은 여전히 그 자리에 건재한지, 골목을 공유하는 삶의 방식의 지속성도 궁금하다. 중심부는 여전히 이곳을 지나쳐가고 있을까, 아니면 마침내 이곳을 발견했을까. 도시는 끊임없이 변한다. 그러나 지층은 견고하다. 타블로이드 판형을 펼치자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좁은 골목, 낡은 지붕, 엉킨 전깃줄. 그리고 그 사이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 2015년의 묏골마을은 그렇게 종이 위에 남아 있다.
“사소한 관찰은 낱말이 되고, 소소한 탐닉으로 이야기는 완성된다.”
[프로젝트 전체 보기] 도시의 문장을 수집하다, 독립잡지 <잼이路>
※ 이 글은 2014~2015년 도시의 골목을 기록했던 독립잡지 <잼이路>의 여정을 2026년의 시선으로 소환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Collaboration] 공간과 브랜드의 서사를 설계합니다.
단순한 홍보가 아닌, 브랜드가 지닌 ‘대체 불가능한 이야기’를 기획합니다.
도시의 골목을 아카이빙하던 에디터의 시선으로, 브랜드 헤리티지(Heritage)를 단단한 텍스트로 구축해 드립니다.
- Urban & Space Archiving: 공간이 가진 역사성과 맥락을 인문학적 시선으로 해석하여 브랜드 스토리로 치환합니다.
- Micro-History Storytelling: 거창한 역사가 아닌, 소비자가 공감할 수 있는 미시적이고 감성적인 서사를 설계합니다.
- Editorial Leadership: 기획부터 취재, 제작까지. 하나의 완결된 콘텐츠 시리즈를 총괄하는 에디토리얼 솔루션을 제공합니다.
“모든 브랜드엔 말하지 않은 문장이 있습니다. 그 문장을 찾아드립니다.”
Life Architect, EOM YONG SUN
삶의 밀도를 짓고, 시간의 결을 수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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