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 칼로의 열정과 샤갈의 순수함을 동시에 지닌 한국의 괴짜 예술가, 김점선의 삶과 작품 세계를 들여다봅니다. 철학적 사유를 점과 선이라는 조형 언어로 번역하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10cm의 디지털 화면 속에서 예술적 투혼을 불태웠던 한 인간의 예술적 삶을 기록합니다.
Client: KRX 한국거래소
Project: 사보 기명 칼럼 <Art & Artist>
Category: Art Archive
Credit: 글_엄용선 / 그림_하나아트갤러리 제공
Original Text
프리다 칼로의 열정과 샤갈의 순수함을 동시에 지닌 한국의 괴짜 예술가
“내가 살아 있는 이유는 바로 아름다움을, 생명의 환희를
표현하기 위해서다. 내가 느낀 감동을 증폭시키고 고착시켜서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점선… 이름만으로도 뭔가 그림을 그릴 것 같은 사람이다. “오로지 그림을 그려보려는 욕망 하나 때문에 생명을 연장했다.”는 작가의 고백처럼 그녀의 삶은 그림을 그리도록 운명 지어졌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그녀가 그림을 그리고자 홍익대 대학원을 진학한다. 그림 외적인 삶을 살 것 같았던 그녀의 인생이 그림 내적인 삶으로 전환하는 순간이다. 그날 이후, 화가 김점선, 그녀 인생은 그 모든 희로애락을 ‘그림 그리기’와 함께했다. 생전의 그녀가 말했듯 자신의 이름처럼 ‘점’과 ‘선’으로 이뤄진 미술을 하게 된 건 어쩌면 숙명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 정해진 숙명 앞에 또 하나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점선… 이름만으로도 뭔가 글을 끼적거릴 것 같은 사람이다.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를 활자중독이라 칭할 만큼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는 그녀가 글을 쓰기 시작한건 어떤 처절함이 기인한다. “그림은 생각하지 않고 그냥 그린다. 그러나 글은 많이 생각해야 했다.” 그렇게 힘들게 쓰여진 그녀의 글들은 너무 힘들어서, 노동에 치여서, 스러져 버릴 것만 같은 그녀 자신에 대한 연민의 기록이자 공포에 저항하는 자기학대의 예술적 승화였다. 그림과 글, 그녀에게 있어 이 두 가지는 점과 선으로 할 수 있는 지상 최고의 놀이이자 처절한 육체노동 이었으며 그런 그녀의 세밀한 인생 기록이었다. 열정적으로 살았다. 순수하게 그렸으며 치열하게 써내려갔다. 그렇게 살다보니 어느 순간 유명인이 돼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유명세도 그녀의 본질을 흐트러트리지는 못했다. 그것이 곧 화가 김점선, 글쟁이 김점선의 삶이었다.
프리다 칼로의 열정으로 김점선, 자신을 그리다.
돌아선 애인이 그 그림을 보고 다시 매혹되어 돌아오라고 있는 힘껏 아름다운 자화상을 그린다. 맥시코의 여류화가 프리다 칼로, 오십 평생 200점에 달하는 그림을그렸으며, 그 그림들 중 대부분이 자화상이다. 그림을 그리는 그녀는 그만큼 절실했다. 그런 프리다 칼로처럼 한국의 여류화가 김점선도 그림을 그린다. 프리다 칼로의 열정에 매혹되어 같은 온도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림을 그림으로서 있는 그대로의 자기애를 시각적으로 적나라하게 풀어낸 두 여류화가, 그러나 프리다 칼로가 그림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드러냈다면 김점선은 그림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숨긴다.

“나는 말 위에서 죽었다.
내가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죽어가는 나를 태운 채 말은 달리고 있었다.
그때 말과 나는 구별이 되지 않았다. 말이 내 자신인지 내가 말인지…
또다시 사람으로 태어났다. 화가가 되었다. 말을 그린다.”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을 보면 누구나 캔버스에 그려진 이가 칼로 자신임을 쉽게 알수 있는데 반해 김점선의 그림에서 그것은 여러 가지 형태로 표출되어 나타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말’이다. “말이 내 자신이지 내가 말인지…” 오래전에 아버지가 주었다는 말, 아버지가 열어준 세상에서 김점선은 말이 되어 달린다. 말 위에서 살고 말 위에서 죽는다. “말 잔등이 내 죽음의 참상이다. 내 최후의 기억은 말 잔등에서 멈춘다.” 김점선은 말을 그린다. 이유도 모르는 체 숙명처럼 그려댄다. 칼로의 자화상이 껍데기에 영혼을 불러 넣는 작업이었다면 김점선의 말 그림은 껍데기를 까발려 그 속의 영혼을 드러내는 작업인 것이다.
그것은 어쩔 땐 토끼의 모습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어느 땐 오리 혹은 코끼리가 되기도 한다. 심지어 꽃, 나무, 과일로도 나타난다. 김점선 주변의 모든 것, 그녀가 그리는 모든 것에 그녀의 영혼이 숨 쉰다. 그렇게 화가는 자신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리는 순간만큼 그녀는 참으로 행복한 화가인 것이다.
샤갈의 순수함으로 김점선, 그림을 그리다
“단순하게 살고 싶었다. 몽태뉴처럼 단순하게 살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한적하고 단순한, 그런 삶을 꿈꾸었다.”
그녀의 이런 바람이 특유의 화법으로 고착되어 김점선 화법으로 표현된다. 어린아이의 그림 같은 꾸미지 않는 순수함, 버린다는 것, 꾸미지 않는 다는 것이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쉽지 않음을 알기에 그녀의 그 욕심 없는 마음에서 그녀의 그림들은 더없이 맑게 빛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그림을 못 그린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같이 완벽한 그림만을 보고
자신도 그렇게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무렇게나 막 그림을 그렸다.
내 그림을 보고 누구나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누구도 쉽게 저지르지 못할 당당함으로 그것들을 표현해 내며 그런 자신의 선택을 확고한 믿음으로 지켜나간다는 건 분명 그림을, 그림 그리기를 대하는 김점선의 진심이 그만큼 진실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주 작은 아이들이 거침없이 자신을 표현해대는 그 자체에서 감동을 받는다는, 그래서 아이처럼 그렇게 쓱쓱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는 김점선은 그만큼 순수한 사람이다.
나는 오리가 될 수는 없다.
나는 오리를 그릴 수는 있다.
나는 오리를 그리는 사람이다.
나는 하늘을 그리는 사람이다.
나는 사람도 그리는 사람이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나는 사람이다
괴짜 오리 김점선.
김점선은 사람이다. 그냥 나같이 평범한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 그림을 그린다. 글을 쓴다. 말을 한다. 그럼으로써 그녀를 드러낸다. 사람들은 그녀가 그린 그림, 그녀가 쓴 글들, 그녀의 말과 행동들이 그들의 방식과 너무도 다름에 당황하지만 그녀의 그림이 유명해지고 글이 널리 퍼지고 말과 행동이 이슈가 되면서 그녀를 주목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그녀를 ‘괴짜’라 부르기 시작했다.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없는 억압된 자의식의 대리만족이 평범한 그녀를 ‘괴짜’로 만들었다. ‘괴짜’란 칭호는 그런 세인들의 부러움의 표출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그녀는 살아생전 그토록 꽥꽥거리며 세상에 반하며 살았나보다.
나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김점선 그 자체다.
미국의 시인 이디뜨 시트웰의 표현처럼 맨드라미처럼 헝클어진 김점선의 머리였다. 짧게 잘린 머리칼은 어지럽게 엉켜있고 화장기 없는 얼굴에 유난히 도드라진 광대뼈, 시원하고 거침없는 말투에 알 수 없는 옷차림… 여자는 여자답고 남자는 남자다운 세상을 경멸하며 스스로를 유니섹스 모드의 가장 성공적인 표현물이고자 했던 김점선은 그런 자신을 남자도 여자도 아닌 ‘김점선’ 그 자체로 봐주길 원했다.
괴짜 김점선의 행보
모습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괴짜스러웠던 화가 김점선은 그 보다 더 기이한 행보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자신은 ‘말’이었다며 스스로의 전생을 단정 짓고 다시 태어나면 오리가 되고 싶다 한다. 상식에 어긋나는 사람을 만나면 상대가 누구든 거침없이 싸우고 친구의 자살권유에 흔쾌히 응할 만큼 순수하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장가보낼 때도 김점선은 신랑 부보 자리가 아닌 하객으로 참석한다. 그것도 평소 즐겨 입는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으로 말이다. 그의 이런 독특한 생각과 시각들을 닮아 격 없이 자유로운 그녀의 그림은 지극히 순수했다. 김점선 화백의 오랜 지인이었던 고 박완서 작가는 “대상의 위선을 걷어내고 직통으로 본질을 포착한” 그림이라며 그 순수성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나는 내게 부여된 고통에 감사한다.
시원하고 거침없는 말투, 호불호가 명확한 김점선은 그리는 게 좋았다. 그리는 게 행복했으며 그림으로서 모든 고통을 잊고 살 수 있었다. 화가로서 성공도 했다. 제 1회 앙데팡당전에서 백남준, 이우환의 추천으로 파리 비엔날레 출품 후보에 선정되며 화려하게 등단(1972년)한 후, 2년 연속 평론가협회 선정 미술 부문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로 선정(1987~1988년)되기도 하였다. 많은 이들이 그녀의 그림을 찾았으며 여러 곳에서 그녀를 필요로 했다. 수많은 국내, 외 기획전에 초대되었고 다수의 개인전을 통해 꾸준히 작품 활동을 지속하였다. 그림을 통해 글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 화가를 신명나게 했다. 그 무엇도 화가의 왕성한 창작욕을 방해할 순 없었다. 그런 그녀가 오십 견으로 오른 팔을 못 쓰게 되었을 때, 그때 화가의 마음이 어땠을까? 김점선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에 매일을 징징 울었다고 한다. 그러다 그것이 소용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다. 컴맹임을 자랑삼던 김점선이 ‘디지털 세계’에 입문한 것이다. 노트북 그림판에 그림을 그려 판화지에 출력한 ‘디지털 판화’의 세계를 창조, 비로소 10Cm의 예술이 날개를 단다. “나는 내게 부여된 고통에 감사한다. 그 고통을 새로운 세계로 몰고 간 용기 있는 나 자신에게 감사한다.” 그렇게 그녀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고 또 그렸다.
김점선, 풀숲에서 눕다.
영원한 유니섹스의 표본으로 남고자 했던 김점선이 2009년 3월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스스로 전형적인 여자이기를 거부했던 한 괴짜 예술가를 죽음으로 몰고간 병명이 ‘난소암’이라니… 이 예기치 못한 아이러니에 생전의 화가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아마도 크게 당황했겠지만 결국엔 크게 웃었으리라. 생의 마지막 순간 까지 창작의 끈을 놓지 않았던 화가의 열정이, 그녀의 행위가, 순박하고 동화적인 그녀의 그림들이 우리가 잊고 살던 유토피아적 세계를 환기시킨다. 풀숲에 누워 바람을 맞으며 어서 오라 손짓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아름답다며 그렇게 우리를 설득하고 사랑하는 남편의 곁으로 조용히 떠나갔다. 여자로서 예술가로서 생을 아름답게 마감하는 참 그녀다운 마지막이다.

김점선은 1946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이화여자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했지만 그림을 그리고자 1972년 홍익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한다. 그해 처음 열린 앙데팡당전에서 파리 비엔날레 출품후보로 선정되어 화려하게 등단, 그 후 꾸준한 작품 활동으로 다수의 개인전과 초대전에 참여하여 그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한다. 1987년과 1988년 2년 연속 평론가협회에서 선정한 미술부분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로 선정되었으며 저서로 <10Cm 예술>,<나, 김전선>,<김점선 스타일>,<점선뎐>등이 있다. 2009년 3월 난소암으로 타계하였다.
[원고발행] 프리다 칼로의 열정과 샤갈의 순수함을 동시에 지닌 한국의 괴짜 예술가, 김점선 (클릭)




2026 Reflection
점과 선으로 그린 자유, 김점선
점과 선 사이, 고통을 돌파한 ‘10cm의 예술’
김점선, 이름부터 그림을 그릴 운명이었던 사람이다. 점과 선, 그것은 모든 형상의 시작이자 끝이며, 그의 생애는 그 두 요소 사이를 오가는 숙명적 여정이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으나 그림이라는 내적인 삶으로 전환한 이후, 그의 삶은 오로지 그리겠다는 욕망 하나로 연장되었다. 희로애락의 모든 순간이 캔버스 위에 침전되었다. 그에게 그림은 지상 최고의 놀이인 동시에 처절한 육체노동이었으며, 치열한 자기애의 기록이었다.
자신의 상처를 화폭에 낱낱이 드러낸 프리다 칼로처럼, 김점선 역시 그림 속에 자신을 적나라하게 풀어놓았다. 다만 그는 껍데기 대신 ‘말(Horse)’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영혼을 드러낸다. “말이 내 자신인지, 내가 말인지…” 그의 고백처럼, 말은 아버지가 열어준 세상이자 자신의 영혼이 숨 쉬는 구체적인 형상이었다. 토끼, 오리, 꽃으로 변주되는 모든 작품에는 화가 김점선의 영혼은 쉼 없이 달렸다.
그는 몽태뉴처럼 단순하고 한적한 삶을 꿈꿨다. 꾸미지 않은 순수함, 버림의 미학이 깃든 그의 화법은 아이의 눈으로 본 세계처럼 맑게 빛난다. “누구나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거침없이 붓을 휘둘렀다. 위선을 걷어내고 대상의 본질을 직통으로 포착한 그의 그림은, 우리가 잊고 살던 유토피아적 세계를 환기시킨다.
그러나 삶은 그에게 또 한 번의 시험을 건넸다. 오십견으로 오른팔을 쓸 수 없게 된 절망의 순간, 그는 ‘디지털 세계’에서 새로운 출로를 찾았다. 노트북 그림판에 그린 ‘디지털 판화’는 10cm의 작은 공간 속에서 무한한 날개를 단다. “내게 부여된 고통에 감사한다”는 고백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창작의 끈을 놓지 않았던 화가의 강인한 생명력을 대변한다. 고통을 돌파한 10cm의 예술, 그것은 김점선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질주였다.
경계를 지우고 본질을 세우는 용기
2025년의 시선으로 다시 마주한 김점선은 단순한 ‘괴짜’가 아니었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정체성 설계자’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오직 ‘김점선 그 자체’이고자 했던 그의 전위적인 유니섹스 선언은 오늘날 우리가 논의하는 젠더리스(Genderless) 담론의 선구적 실천이었다. 짧게 자른 머리칼과 화장기 없는 얼굴, 거침없는 말투는 사회가 요구하는 관습적 틀을 거부하고 인간 본연의 자유를 쟁취하려는 치열한 투쟁의 결과물이었다. 그는 경계를 지움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본질을 세웠다.
신체적 고통이 그를 ‘10cm의 화면’ 앞으로 이끌었을 때, 그 한계는 오히려 무한한 구조를 빚어냈다. 건축에서 제한된 부지가 창의적인 설계를 이끌어내듯, 김점선에게 디지털 판화는 제약된 육체를 넘어 정신의 영토를 확장하는 새로운 축조의 방식이었다. 기술적 다양성이 넘쳐나는 시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도구가 아니라 ‘고통을 새로운 세계로 몰고 가는 용기’임을 그의 10cm 예술은 웅변한다.
평생 ‘여자다움’을 경멸했던 그가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은 실로 아이러니다. 하지만 그는 이 죽음의 문턱에서도 크게 웃었을 테다. 풀숲에 누워 바람을 맞으며 어서 오라 손짓하는 그의 마지막 그림은, 예술이 어떻게 삶의 비극을 환희로 번역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죽음조차 아이러니로 승화한 예술적 마감. 김점선이 남긴 점과 선은 이제 우리의 뒤틀린 자아를 다시 세우는 단단한 지지대가 되어, 여전히 살아 숨 쉰다.
누군가의 멈춰버린 꿈, 어느 퇴역 장군의 쓸쓸한 뒤안길, 더 갈 데 없어 동백꽃처럼 타올랐던 삶들. 항구가 품은 슬픔의 뱃고동 소리는, 정체된 삶을 끝내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기꺼이 출항하라는 응원이 된다. 목포는 더 이상 소외된 뒤안길이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상처를 응시하고, 무너진 꿈을 다시 설계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둔 ‘지붕 없는 환대(Open Hospitality)’의 성소다. 비로소, 무너지는 것들조차 얼마나 아름다운 삶의 자산이 될 수 있는지를 배운다.
[Collaboration] 사유의 깊이로 지면의 품격을 설계 합니다.
세상의 풍경 속 문장을 읽기 위해 여행과 건축, 예술을 사유의 렌즈로 삼습니다.
라이프 아키텍트 엄용선은 현상 너머 본질을 응시하며, 대상의 결을 삶과 연결하는 정제된 인문학적 내러티브를 설계합니다.
- 기명 칼럼 및 에세이 기고: 삶의 구조와 방향성을 탐색하는 깊이 있는 시선을 제공합니다.
- 인문학적 인사이트 콘텐츠 기획: 문화와 예술적 자산에서 시대적 통찰을 길어 올려 고품격 콘텐츠로 형상화합니다.
- 전문 필자의 페르소나: 논리적이며 신뢰감을 주는 문장, 사유의 여백과 흐름을 조율합니다.
텍스트를 넘어 뉘앙스로, 메시지를 넘어 여운으로 독자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깊이 있는 시선과 정제된 언어가 필요한 모든 지면에 독보적인 사유의 층위를 입힙니다.
매체 칼럼 기고, 전문 에세이 연재, 인문학 기반 인사이트 리포트 및 콘텐츠 기획
Life Architect, EOM YONG SUN
삶의 밀도를 짓고, 시간의 결을 수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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