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과 북악산 자락을 끼고 도심 속 고즈넉함이 자리한 서울 부암동 산책길을 따라간다. 안평대군이 꿈꾼 무릉도원인 무계정사터부터 저항 시인 윤동주의 고결한 숨결이 깃든 시인의 언덕까지, 역사와 예술이 겹겹이 쌓인 부암동의 느린 시간을 기록한다.
Client: 농협은행
Project: 사보 <올백플랜> TRAVEL 연재
Category: Local Archive
Credit: 글/사진: 엄용선
Original Text
인왕산과 북악산 자락을 끼고 도심 속 고즈넉함이 자리한다.
취향 따라 걷는 서울 부암동 시크릿 산책

울창한 수풀 속 싱그러운 풀 내음이 가득하다 . 산자락 능선을 타고 아담하게 자리한 동네, 그곳의 골목은 오르락내리락 가벼운 리듬 속에 있다. 그 흔한 고층빌딩 하나 없이 평온한 눈높이의 시선, 옹기종기 어깨를 맞닿은 집들 사이로 미술관과 갤러리, 작은 가게들이 저마다의 개성으로 발길을 붙잡는다. 서울 속 숨겨진 청정 지대, 부암동으로 떠나는 하루. 그곳에서의 시간은 유달리 느리게 흘러간다.
역사의 흔적이 도처에 만연한 무계정사길


수려한 자연 경관, 문화⋅예술과 함께 유구한 역사가 숨 쉬는 동네, 그 미덕을 찾아 떠나는 여정의 시작은 <부암동주민센터>다. 경복궁역에서 출발한 초록색 지선 버스가 자하문터널을 우회하여 청와대 길로 접어들자, 창문 너머 녹음이 울창하다. 계절 따라 맞춤옷을 갈아입는 자연의 본질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날것의 한가운데 생동하는 기쁨을 감출 수 없다. 부암동은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만연하다.
<무계정사길>은 부암동 주민센터에서 인왕산 등산로 입구에 이르는 560m의 구간으로 무계원과 안평대군 이용, ‘운수 좋은 날’의 현진건, 반계 윤웅렬의 집터가 있으며 그 끝에 자하미술관과 목인박물관 목석원이 위치한다. 그 중 <무계원>은 자연에 어우러진 한옥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도원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무계정사>에서 그 이름을 빌려왔다. 당대 문인과 학자들 간의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던 곳으로 아름다운 정자는 역모죄로 사사된 안평대군과 그 흥망성쇠를 함께하였다.
지금의 무계원은 1910년대 종로구 익선동에 있던 송은 이병직의 ‘오진암’을 이축하여 완성되었다. 무계원 대문을 들어서자, 계단을 위 경사진 부지 위에 고즈넉한 한옥 건물이 자리한다.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 각 공간에는 시기마다 색다른 전시가 열린다. 특히 행랑채 상설전시관에서는 무계원의 기원이 되는 안견의 ‘몽유도원도’ 영인본과 디지털 아트를 만날 수 있다. 안평대군 이용과 현진건의 집터는 안내석에 새겨진 글귀로 그 존재를 가늠한다.
산 능선을 타고 유난히 가파르고 좁다란 골목을 오르자 굳게 닫힌 문 너머 웅장한 한옥이 빼꼼하다. <반계 윤웅렬 별장>은 개화파 지식인 윤치호의 아버지 윤웅렬이 창의문 밖 경승지에 지은 별장으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서울 편 2’에 소개된 적이 있다. 개인 소유의 한옥 별장은 1년에 딱 1번, 오픈하우스 기간에만 오픈된다고. 우편물의 주인을 살피는 우체부의 정겨운 뒷모습을 뒤로하고 그 길의 끝, <자하미술관>에 당도한다. 서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미술관은 북악산을 내려다보는 비봉능선이 병풍처럼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인근에는 한국 전통 목조각상과 다양한 석물을 볼 수 있는 <목인박물관 목석원>이 위치하니 함께 둘러봐도 좋다.
낮과 밤이 다른 부암동, 동네 한 바퀴



산등성 대로변을 따라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며 가던 길을 붙잡는다. <스코프>는 자타공인 부암동의 명물이다. 영국인 남편과 한국인 아내가 함께 만드는 스콘은 투박한 겉모습에 진한 맛이 일품이다. 한국식 먹거리는 <동양방아간>이 꽉 잡고 있다. 손수 제조하는 떡을 매일 소량만 소박하게 내어놓은 좌판, 그 곁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주인 할머니의 모습은 정겨운 동네 분위기를 완성한다. 중국 정통 텐진식 만두를 맛볼 수 있는 <천진포자>, 담쟁이덩굴이 전체를 감싸고 있는 2층의 건물에는 건강한 빵을 생산하는 <묘한빵집>과 이탈리아 식재료를 취급하는 <꼰떼>, 슬로우 라이프 건강식을 지향하는 <데미타스>가 자리한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맘스키친>은 정갈한 일본 가정식을 제공하며 <란저우육면>과 <목식당>에서는 특별한 중식 메뉴를 만날 수 있다. <부암동돈까스집1979>은 레트로 감성의 두툼한 경양식 돈가스를 제공한다. ‘부암동 빙수’를 뜻하는 <부빙>은 수요미식회(209회)와 생생정보통(914회)에 소개된 바 있는 유명 빙수집이다. 대기는 필수로, 특유의 달콤시원함은 긴 기다림을 기꺼이 감수한다.

부암동에서의 특별한 한때는 거실 속 콘서트, <쌀롱드무지끄>가 책임진다. 주기적으로 열리는 소규모 클래식 공연이 있는 곳, 음악이 있는 열린 공간에서 저마다 가지고 온 음료와 주류를 나누며 소통하는 뮤직 타임은 음악가와 관객을 긴밀히 연결하며 잊지 못할 경험을 선사한다. 북악산 1번 출입구 터널을 마주한 한옥 공간, <아트포라이프>는 심상치 않은 비주얼이 우선 눈길을 끈다. 벽면 가득한 사진 작품과 다양한 오브제, 담쟁이덩굴, 오래된 나무 테이블 등등. 주인장의 취향을 오롯이 대변하는 공간에서의 한 끼 식사는 카프레제, 스테이크 스튜, 파스타 등이 주요 라인업으로 와인 리스트도 다양하다. 조금 더 힘을 내어 산길을 오른다.


카페 <희작>은 부암동의 떠오르는 ‘뷰 맛집’이다. 내부 통유리를 통해 조망하는 마운틴 뷰가 일품으로 하트 모양으로 뚫린 천장 역시 인스타 인증샷으로 왕왕 등장한다. 그 인기만큼 찾는 이가 많은 카페는 주말이면 빈자리를 찾기 힘드니 여유가 된다면 평일 방문을 필히 추천한다.

부암동에 밤이 찾아왔다. 온 동네 닭튀기는 냄새가 진동하면 발걸음은 자연히 <계열사>를 향한다. 전국 3대 치킨의 명성에 걸맞은 긴 대기, 한입 베어 문 후라이드는 ‘겉바속촉’의 진수를 보여준다. 낮과 밤이 다른 가게, <부암동 와플>은 밤이면 동네 주민들의 작은 술집으로 변모한다. 대표 메뉴는 주인장의 사랑이 가득 담긴 ‘사랑 하이볼’로 매우 스트롱한 맛은 일명 ‘악마의 하이볼’로 통한다. (2025년 12월 현재 이곳은 술집 ‘강석종’으로 변모하였다.)
한양의 사소문, 창의문에서 시작하는 인왕산 둘레길



한양의 사소문(四小門)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 문루가 그대로 남아있는 <창의문>을 통해 서울의 역사를 되돌아본다. 과거 양주, 고양 방면으로 향하는 교통로로 역할 했던 문, 성곽을 더듬어 내딛는 걸음이 차도를 건너 인왕산 숲길을 향한다. 그 초입에 자리한 <윤동주 문학관>과 <시인의 언덕>은 자기 고백적인 서정시로 사랑받는 저항 시인, 윤동주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옛 수도시설을 개조한 건물은 깔끔하고 소박한 외관을 가지며 총 3개의 전시실로 구성된 내부에는 실제 그의 생가 우물에서 가져온 낡은 목판과 사진, 친필 원고와 각종 유품이 진열되어 있다. 문학관의 백미는 컴컴하고 축축한 공간에 내려오는 한 줄기 빛이 인상적인 제3전시실, ‘닫힌 우물’이다. 시인의 생애 마지막을 지냈던 후쿠오카 형무소를 재현한 곳으로 윤동주 일생이 담긴 영상은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문학관 위 시인의 언덕에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서시’가 바위에 새겨져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멀리 N타워가 뚜렷한 조망은 밤이면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인왕산 기슭을 따라 이어지는 자락길을 걷자, 숲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한옥 건물이 눈에 띈다. 인왕산의 자연경관을 그대로 끌어안은 <청운문학도서관>이다. 본래 공원 관리사무소로 사용되었던 건물은 지하층과 지상층으로 구분되며 한옥과 현대식의 조합이 인상적인 건축양식을 보인다. 특히 이곳의 한옥 정자 ‘누정’에서 만나는 폭포는 사시사철 특별한 경관을 연출한다. 자락길을 나와 숲길로 접어든 발걸음이 <더숲 초소책방>에 다다른다. 이곳은 1968년, 김신조 사건 이후 청와대 방호 목적으로 세운 경찰 초소 건물로 2018년, 인왕산이 전면 개방되면서 시만에게 열린 문화카페로 거듭났다. 탁 트인 전망이 일품으로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의 열렬한 지지는 당연지사다.

체력에 무리가 없다면 카페 앞 등산로를 올라 <인왕산 숲속쉼터>를 찾아보자. 깊은 산속 작은 도서관은 단절된 에너지의 평온으로 가득하여 소진된 체력을 금세 달래줄 것이다. ‘아무것도 없구나. 오직 아름다운 것만 있을 뿐’이라는 돌비석의 글귀가 인상적인 <무무대>는 서울 강북을 오롯이 드러내며 시선을 압도하는 전망이 인상적이다. 동네 주민의 산책길 쉼터로 역할 하며 조용히 시간을 보내기 좋은 장소는 낮은 물론, 일몰과 야경 시 특히 더욱 근사할 터다.

어느덧 발걸음은 부암동을 벗어나 옥인동에 이르렀다. <수성동계곡>은 1971년 준공된 옥인시범아파트를 2010년 철거하면서 복원된 공원으로 예의 그 수려한 경관이 압권이다. 이는 조선시대 풍경화가,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에도 잘 나타나 있다. 경복궁역을 가는 마을버스 09번도 이곳이 종점으로, 부암동 하루 여행의 마무리로 이보다 좋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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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Reflection
취향 따라 걷는 서울 부암동 시크릿 산책
2025년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는 부암동(付岩洞)은 단순한 서울 속 청정 지대를 넘어 삶의 자세를 묻는 은유로 다가온다. ‘바위에 기댄 마을’이라는 지명의 유래처럼, 이곳은 인왕산과 북악산이라는 거대한 산세에 몸을 맡기고 스스로를 낮춘 동네다. 고층빌딩 하나 없이 평온한 눈높이의 시선, 옹기종기 어깨를 맞닿은 집들. 부암동은 묻는다—당신은 무엇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가. 그 기댐은 의존인가, 아니면 겸허인가.
닫힌 우물에서 건져 올린 ‘나’라는 문장
옛 수도시설의 물탱크를 개조해 탄생한 윤동주 문학관의 ‘닫힌 우물’은 부암동 산책의 인문학적 정점이다. 어둡고 축축한 공간 속으로 떨어지는 한 줄기 빛을 응시하며,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한 시인의 마지막 시선을 더듬는다. 스물아홉 해의 짧은 생이 응축된 그 차가운 어둠 속에서, 시인이 마주했을 자아 성찰의 시간을 따라간다.
어둠 속에서도 위를 올려다보는 자세, 갇혀 있어도 하늘을 잃지 않는 시선. 이 ‘응시의 힘’은 시인의 언덕을 오르자 스스로를 돌아보는 ‘서시(序詩)’의 시간을 권유한다. 바위에 새겨진 ‘서시’를 읽으며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랐던 시인의 마음을 가늠해본다.
2025년, 다시 찾은 이 ‘유폐된 초월’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 내면의 중심을 다시금 발견한다. 닫힌 우물은 여전히 거기 있고, 한 줄기 빛은 여전히 떨어지고 있다. 그 빛을 올려다보는 자만이 건져 올릴 수 있는 문장이 있다. ‘나’라는, 아직 끝나지 않은 한 편의 시를 읊조린다..
‘부암와플’에서 ‘강석종’으로, 가족의 시간을 선택한 용기
부암동 골목의 한 귀퉁이, 낮에는 부인이 와플을 굽고 밤에는 남편이 술을 팔던 ‘부암와플’은 이제 주인장의 이름을 내건 이자카야 ‘강석종’으로 변모했다. 이는 시간이 멈춘 부암동에서 그간 있던 유일한 변화로 기록된다. 엇갈리는 시간 속에 서로를 마주할 틈 없던 부부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아이와 함께 보낼 시간의 소중함을 위해 이같은 결단을 내렸다고 했다.
“한번 흘러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깨달음은, 성장보다 ‘지속’과 ‘함께’를 선택하게 했다. 자신의 이름을 상호로 내건다는 것은 공간에 철학과 삶의 방식을 온전히 담겠다는 선언이자,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얼굴을 내미는 책임의 표현이다. 약 12석의 아담한 바 좌석으로 운영되는 이 ‘심야식당’은, 현재 부암동에서 가장 따뜻한 사랑방이자 동네 주민들의 은밀한 안식처로 사랑받고 있다. 부암동이 지향하는 ‘느린 삶’과 ‘인간 중심의 아키텍처’가 무엇인지를 몸소 증명하는 곳, 부암동에는 술집 ‘강석종’이 있다.
다시 흐르는 시간, 눈높이의 위로

2022년 청와대 개방 이후, 창의문 일대는 새로운 유동 인구를 맞이하게 되었다. ‘숨은 서울’은 이제 ‘열린 서울’로 전환 중이다. 하지만 부암동에서의 시간은 유달리 느리게 흐른다. 40년 넘게 자리를 지킨 떡집 할머니의 좌판과, 가족의 시간을 위해 간판을 바꾼 술집 ‘강석종’의 풍경은 우리에게 ‘성장’보다 ‘삶의 질감’이 중요함을 가르쳐준다.
2025년의 시선으로 마주한 부암동은 도심의 가장 높은 곳에서 풍경을 조망하면서도, 사람과 일상의 가치에 따뜻하게 눈을 맞추는 법을 일깨워주는 공간이다. 효율과 성장의 속도전에서 잠시 벗어나 가족과의 소중한 시간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간판을 바꿔 단 작은 술집의 용기처럼, 스스로의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이들의 온기 어린 삶의 질감이 살아간다. 부암동의 언덕길에서 도심의 화려함 대신 내면의 무릉도원을 발견하는 정적이고도 깊은 휴식을 경험해 보자.
[Collaboration] 사유의 깊이로 지면의 품격을 설계 합니다.
세상의 풍경 속 문장을 읽기 위해 여행과 건축, 예술을 사유의 렌즈로 삼습니다.
라이프 아키텍트 엄용선은 현상 너머 본질을 응시하며, 대상의 결을 삶과 연결하는 정제된 인문학적 내러티브를 설계합니다.
- 기명 칼럼 및 에세이 기고: 삶의 구조와 방향성을 탐색하는 깊이 있는 시선을 제공합니다.
- 인문학적 인사이트 콘텐츠 기획: 문화와 예술적 자산에서 시대적 통찰을 길어 올려 고품격 콘텐츠로 형상화합니다.
- 전문 필자의 페르소나: 논리적이며 신뢰감을 주는 문장, 사유의 여백과 흐름을 조율합니다.
텍스트를 넘어 뉘앙스로, 메시지를 넘어 여운으로 독자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깊이 있는 시선과 정제된 언어가 필요한 모든 지면에 독보적인 사유의 층위를 입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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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Architect, EOM YONG SUN
삶의 밀도를 짓고, 시간의 결을 수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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